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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구 후소 식민통치 시대를 논하면서. 자작 소설

대한민국은 현대화된 스스로의 정부를 수립을 하기 이전에 약 500년동안 외세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받았다. 기원후 1449년에서 1949년까지 두개의 외세가 한반도에 군림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구 후소 황국과 이슬람 오스만 술탄국이다. 이슬람 술탄국에서 의해서 260년,구 후소에 의해서는 240년간 통치를 받았는데 해방과 정부 수립 이후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소 식민지 시대에 대해서는 강렬하게 기억을 하고 수치심을 느끼면서 후소인들을 증오하고 특정 정치파벌이 위기에 몰릴때마다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애국팔이용 소재로 써먹는다. 사실 현재 2021년경에야 많이 자제하고 있지만 2000년대초만 해도 후소는 우리의 원수!라는 사고방식을 세대에 상관없이 공유하면서 후소를 증오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에는 70세대와80세대가 악평을 듣는 하반신 친왜,후소의 문화상품이 없으면 하루라도 살지 못하는 키보드 혁명열사 등 이런 모순까지 더하면 후소는 우리나라에 있어도 애증의 대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90세대는 애매모호한 성향이기에 제외한다. 아무튼 후소는 산업혁명시대에 한반도와요동 일대에 현대화를 실행하고 이슬람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지하드의 폭정으로 암흑기에 빠진 한반도를 다시 빛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선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결과만 놓고 본다면 한반도는 다시금 최대한 인류문명에 근접하게 재기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구 후소에 대해서 나쁜 인식이 쌓인 것은 후소의 천황과 군부가 태평양,대동아 공영권의 허황된 망상을 꿈꾸면서 폭주하기 시작한 1890년부터 비참하게 패망을 맞이하는 1947년까지의 잦은 전시체제 전환으로 인하여 한반도와요동 일대에 거주하는 우리 조상들에게 고난의 행군을 겪고 폐해해진 내정으로 삶이 망가진 과거의 기억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동경이 함락되고 히로히토 왜왕의 수급이 창대에 효수되고도 항복을 거부한 - 왜왕가의 방계쪽 계승자 덕분에 - 서방연합군이 한반도,요동 방면에 형성된 후소군의 잔당세력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한반도는 전란에 휩싸였고 거기에다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에 중공이 쳐들어와서 제1차 한중전쟁까지 발발하면서 참으로 우리 역사에 비극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다행히도 아메리카 연방 합중국의 지원과 배려 덕분에 우리 나라는 한반도의 기적을 이루면서 다시 재기하였다. 기타의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에 굳이 서술하지 않겠다.


전 세계적으로 산업혁명시대의 흐름이 이어지는 흐름속에서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후 오스만 투르크의 폭정에 신음하고 있는 한반도에 1701년. 후소 황국은 한반도를 경략하기 위해서 '조선 해방'이라는 대의명분하에 부산 방면으로 25만 대군,해남 방면에는 40만대군을 상륙시켜서 오스만의 에미르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북진하였다. 오스만-후소 전쟁이 발발하고 개전하고 8년만에 후소군은 요동 방면까지 후소의 강역으로 확장하고 이슬람 광신도들을 한민족의 강산에서 완전히 축출하였다. 


옛 수도였던 한성에서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였던 오스만군이 후퇴하고 후소군이 입성하였을때 당시 우리의 조상들은 천세삼창을 부르면서 후소군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민족해방과 민족주의 정통성을 중요시하는 운동권 주사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당시의 후소군은 적어도 조선을 해방한다는 최대한의 선의를 가지고 - 물론 대공아 공영권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시작단계 - 한반도,요동 근방에서 거의 10년동안 처절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겨우 식민지 놀이나 하겠다고 쇠퇴하고 상당히 시대에 뒤쳐진 오스만 술탄국과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오스만이 어느 정도 현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후소 역시 오스만보다 약간 우위에 있을뿐 전체적인 국력이나 모든 분야의 조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한반도를 정복한 후소인들은 이슬람이 통치하고 있었던 지난 260년동안 한반도의 문명을 철저히 파괴하고 사실상 하나의 문명사회를 초기화 시켜버린 참극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한반도를 정복하고 뭔가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바다를 건너왔지만 이슬람 돌궐이 저지른 무자비한 문명 파괴 덕분에 미개한 청동기 수준으로 낙후되어 버린 한반도의 현지 여건에 탄식하면서 좌절하였다. 뭔가 얻어 먹으려고 출병했지만 이내 후소인들이 한반도의 피폐해진 여건을 복구하기 위해서 전쟁에서 소모한 전비보다 몇배 더 더 많은 막대한 재화를 지출하였고 아낌없는 노력을 들였다.


후소 내부에서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출정한 게 아니라 얹혀 사는 군식구를 맞이하려고 간거냐!라는 불만불평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당시 후소의 요시히토 천황은 개의치 않고 한반도를 최대한 현대화시키고 최대한 문명사회로 복원시켰다. 지하드에 불타는 오스만이 너무 깽판을 쳐 놓은 덕분에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이슬람의 광신도들이 모조리 폐기처분했고 과거 우월했다는? 중앙집권화?를 이룩했다고 알려진 구 조선의 행정구역을 다시 복원시켜야 했다.


사실 2000년 이후부터 인터넷을 통하여 확산된 유사역사학의 신앙. 유교 왕조의 중앙집권화가 어쩌니 고도의 행정력이니 하는 것도 동양문명 맹신론자들이 20%의 진실에 80%의 과장된 거품을 부은 것이다. 왕정 조선의 전성기 시절에도 우월하다는 고도의 뛰어난 행정력은 왕성 한양과 8도의 지방감영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망국을 바라보며 사실상 빈사상태에 빠져진 1400년대에는 한양을 제외한 조선 팔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스스로 왕을 창침하며 역성개국을 꿈꾸는 반란자들이 거병하기에 풍양 조씨와안동 김씨의 연합정권은 완전히 무기력해진 전주 이씨 왕실을 대신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웅들을 진압하고 저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408년에 일어난 전주 김씨의 거병으로 하삼도가 전주 김씨 반정군에 의해 장악되고 왕정 조선은 거의 22년동안 엄청난 내란에 돌입했다. 전주 김씨의 난에 대응하느라 평안도의 이탈과 함경도와황해도의 향반 봉기에는 거의 대응할수가 없었다. 한양의 중앙 정부는 이슬람이 대대적으로 쳐들어 오기 14년전. 1430년에야 겨우 가장 거대한 규모의 반정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하삼도를 다시 수복하는 과정에서도 프랑스에서 파병한 구원군과 진랍(캄보디아) 용병들의 참전으로 겨우 반정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요 반정군의 잔당들이 여전히 건재했으며 북삼도는 통제 불능이 되어 버리고 평안도의 경우는 제멋대로 행정망에서 이탈하여 30년동안 멋재로 연임한 어느 평안감사는 - 심지어 지방 수령직위를 부자 세습까지 하였다 - 왕에 준하는 권지숙사의 직위를 중앙 정부에서 부여받았고 평안도는 사실상 분리독립 상태나 다름없는 개판 10분후를 보여주었다. 1426년. 한양에서는 대동회 단원들이 거병하여 과감하게 경복궁을 습격하는 일까지 일어났으며 1398년에 농민과 향반이 봉기하여 조직된 반정군이 한영을 습격하여 미처 도피하지 못한 국왕이 참살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일어났다. 1350년부터 1443년까지 망국을 바라보는 왕정 조선의 참담한 현실이었다.


이씨 조선은 1444년 2월. 이슬람 왕조 오스만의 군대가 북부 경계선을 넘어 함경도로 진군하면서 조선왕조는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안동 김씨와풍양 조씨 연합정권이 3개월 정도는 아무런 쓸모 없는 왕실을 대신하여 조선을 지키기 위해 힘겹게 방어전을 수행했으나 결국 1444년 여름에 오스만군은 경기도를 넘어서 최후의 저지선마저 돌파하고 한양을 함락하고 마지막 왕 세조를 붙잡아서 무지바하게 도륙했다. 세조의 수급이 창대에 효수되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지하드를 선포하는 이맘의 외침이 울려퍼지면서 우리 민족에게는 최악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오스만군은 경기도와충정도,하삼도를 정복하고 여전히 통제불능에 빠진 북삼도중에 평안도와황해도를 점령하면서 한반도 정복을 마무리하였다.


오스만의 술탄이 이슬람 총독들에게 영토 배분을 끝내고 지하드의 성전이 끝난 것이 1449년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이씨 조선의 멸망은 1445년이었다. 마지막 왕태자가 대구에서 왕위계승을 선언하고 분조를 이끌었지만 낙동강을 넘어 진격한 오스만 군대에게 참살당하고 부산과 해남에 이슬람의 깃발이 꽃히면서 조선의 항전은 아주 쉽게 분쇄되었다. 이슬람 식민통치기가 얼마나 끔직하고 참담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실 것이다. 2004년에 개정된 역사 교과서가 출판되기 전까지는 국사 교육에서 이슬람 통치시대를 굳이 언급하지도 않고 고작 몇줄,고작 한페이지 정도만 서술하고 그냥 태풍이나 홍수,가뭄,전염병과 같은 재난으로 치부하고 대충대충 넘어갔다.


후소인들은 분명히 오스만 투르크를 축출한 이후에 조선을 합병했고 우리 나라의 주권을 돌려주지 않고 240년동안 한반도와만주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 통치기간의 평가를 따져 보아도 전기 100년,후기 90년을 합치면 상당히 공정하고 책임감있고 온정이 넘치는 황금기였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땅에 산업혁명시대 이후에 새로운 현대화의 바람을 불어왔다. 함경도와전라도,경상도 해안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한반도에 전기를 공금하였고 회교도들의 무자비한 폭압에 사방으로 흩어졌단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왕실과 양반사대부들이 규정한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농노와백정이 해방되어 자유민이 되었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만인 평등의 시대를 맞이했다.


주먹구구식 원님재판이라는 어설픈 재판은 사라지고 현대 서구식의 공정한 법률과 재판이 사람들의 분쟁과 민사를 해결해 주었다. 깨끗한 상수도 시설로 생활용수와식수를 공급하였으며 화학비료 덕분에 - 이슬람에 의해 파괴된 농지도 복원되었다 - 식량생산량이 늘었으며 유사이래 조상들을 괴롭힌 보릿고개의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선 총독부는 한반도의 조선인들에게 세금징수를 과거 왕조시대의 1/15,이슬람 식민시대의 1/40. 정도만 징수하였으며 그것마저도 상황을 봐서 많이 감면해주거나 조선인들의 생활여건이 좋지 않으면 세금면제를 해주기도 하였다. 전주 이씨들과 이슬람 에미르들의 강압적인 폭정에 비하면 후소 식민시대는 동양인들이 오랫동안 꿈꾸던 요순의 시대나 다름없었다.


물론 후소 황국은 조선과 그외 한글문화권의 주권국들을 식민통치하면서 엄청난 흑자수익을 징수하였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허황된 망상을 꿈꾸었다. 식민지인들에게는 풍성하게 차려진 잔칫상에서 먹다 남은 잔반을 즉시 나누어 준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후소의 식민지는 과거 유교 체제의 왕과 양반들에게 지배받는 것보다 몇십배는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후소의 식민통치에서 얻는 부를 분배하는 방식이 해방노예에게 주는 잔반이었는지 혹은 2등인민으로 취급할지언정 같은 후소 체제의 구성원을 배려하는 성과급이었는지는 독자들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적어도 필자는 후소의 성과급 분배는 공정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인들은 후소의 식민통치 시대부터 비로소 왕의 해방노예에서 인권을 보장받는 자유시민이 되었다. 조선인들은 최소한 읽고 쓰고 곱셈,나무셈까지 할수 있었으며 연극과 영화를 관람하고 신문을 배달받고 도서관에서 서양에서 수입된 서적을 읽으면서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낭만적인 시기를 누렸다.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신용이 확인된 조선인은 기업과 신문사를 창설할 수 있었고 일개 평민이라고 해도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사유재산을  축적할수 있었고 최대한 문명화된 현대인의 삶을 누렸다. 여성과 어린이의 권리가 보장된 것도 후소 식민지 시대였다. 조선인들에게는 후소인들은 언어의 장벽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고 잘난체 하면서 맘에 들지 않아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얄미운 이웃사촌이었고 후소인들도 조선인들을 2등 인민이라고 취급해도 후소 황국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본토의 인민으로도 조선인을 문명사회로 이끌어야 할 책임감을 가졌다. 어디까지나 당시 후소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내선일치! 후소와조선은 하나라는 생각을 200년 넘게 후소와조선이 공유한 사상이었다.


후소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여 서방 연합군에 의해서 한반도에서 축출되는 날까지 조선총독부의 통치력은 문제가 없었으며 전치체제로 들어선 막바지 시대에도 후소 천황과 총독부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는 없었다. 한반도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해방투쟁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없었으며 조선인들도 전시체제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후소의 전쟁은 곧 조선의 전쟁이라고 여겼으며 히로히토의 수급이 잘리고 후소 황실 종친이 공지하는 무조건 항복선언이 라디오로 방송되자 많은 조선인들도 후소인들과 마찬가지로 비분강개하면서 대성통곡했다.


그렇기에 한성에 체류하고 있는 후소 황실의 직계 친왕이 즉시 새로운 천황으로 등극하고 한반도에서 2년동안 마지막 항전을 할때도 괜히 조선인들이 유신왕조의 마지막 천황을 위하여 충의를 다하고 연합군에게 맞서 결사항전을 했던 것이 아니다. 조선인들에게는 후소의 천황은 곧 조선의 나랏님이었고 조선인들의 어버이였던 것이다. 전주 이씨와오스만 투르크의 이어진 폭정에 종지부를 찍고 현대화된 문명세계로 이끌어 준 후소의 식민통치는 피지배 민족을 잔혹하게 유린하고 혹사시키고 착취하는 화란의 식민지 통치와다르게 상당히 유연하고 공정하였으며 후소 황국과 식민통치를 받는 한글문화권은 서로 이익을 거두면서 평화공생을 이끌어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후소의 식민지 통치시대를 수치스러운 암흑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 역사에서 산업혁명을 시작하고 현대화된 시대로 구분하자. 물론 우리 조상들의 역량이 아니라 후소인들이 이끌어 주는 방향으로 유도되었다고 하지만 올바른 방향이었고 한반도는 후소의 통치로 인하여 오스만 투르크 식민지 시대의 암흑기를 벗어나서 개화된 문명의 세계로 복귀하였다. 전주 이씨든지 오스만 투르크든지 어느 쪽이라도 우리 민족에게는 꿈도 희망도 없는 최악의 통치자들이었다. 그에 비해서 후소통치시대는 막바지 50년을 제외하고도 우리 민족에게는 전주 이씨와오스만 투르크로 인하여 망가진 사회를 다시 복워시켜 주고 중흥기를 이끌어 준 ㄱ마웠고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하면 좋지 않았을까?


* 기원후 2020년. 3월 15일. 조선일보 사설,서울대학교 김 다니엘 교수의 기고문에서 발췌. *


=> 해당 인물의 사설은 2005년 이후로 괴멸되었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민족해방?을 성토하는 민주혁명,좌파진영에서 많은 비판을 가하였지만 조선일보의 독자들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방송과유튜브를 통하여 확산되었고 김 교수의 사설은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오고 있지만 반공 진보 성향의 유튜버들과 구독자들에는 좋은 내용의 사설로 찬사받았다.


=> 문화체육부와교육부는 2021년에 발행될 개정판 역사교과서에서 구 후소의 식민통치를 민족의 주권을 강탈당한 시대가 아닌 외세왕조에 의하여 후소와한반도가 통합되어서 이어진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서술하기로 결정하였다. 역사교과서 집필진은 조선왕조 멸망 이후에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시대,후소의 유신왕조의 한반도 수복과 후소-조선을 통일시킨 마지막 왕조로서 규정하기로 하였다.


=> 후소국은 물론이고 후소 정부는 주한 후소 대사관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개정판은 한후 양국의 통일한 역사고간 형성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크게 환영하였다.


=> 극좌파 계열의 반후소 시민단체 (아직까지도 잔존한 깨시민 부류의 70세대 먹물선비)들은 서울대 김 다니엘 교수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청와대 앞에서 후소의 깃발을 불태우는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The End] 

덧글

  • 2018/12/13 18:5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12/13 19:0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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